십자가의 가치

분류없음 2018.04.21 18:39 |

설교본문 : 갈라디아서 3:1-14

설교일자 : 2018. 03. 11.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구원은 무엇일까요? 또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논쟁은 초대교회 이후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구원에 대해 모호하게 말하기 때문에 논쟁이 되는 것일까요? 인간의 무지함과 욕망 때문일까요? 논쟁의 주요한 몇 가지 쟁점들이 있지만 그 쟁점들을 다 살필 수는 없고 오늘의 주제 속에서 한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에 완전하고 충분한가요? 우리는 이미 지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통해서 구원 받는 것의 참된 의미를 보았습니다. 구원은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천국에 가서 더 크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아님을 보았습니다. 구원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는 길이 열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얻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모호하지도 난해하지도 않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분명하고 선명하게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초대교회로부터 끊이지 않고 이러한 논쟁이 이어지는 것일까요? 앞서 질문한 것과 같이 이는 인간의 무지와 욕망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거듭거듭 참된 복음의 의미와 가치를 새겨 믿음을 굳건히 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지와 욕망으로 인해 만들어낸 논쟁들 중 오늘의 본문과 관련 있는 것이 행위에 관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로마서와 함께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미 초대교회에 광범위하게 구원에 관하여 잘못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과 이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다시금 율법을 강조하며 행위로 구원을 이룰 것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이렇게만 이야기한다면 아주 간단한 문제이고(우리는 이미 율법주의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 간단한 것에서 왜 벗어나고 서로 다투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로부터 이어진 논쟁은 사실 중요한 질문에 대한 심오한 고민과 논쟁으로부터 비롯합니다. 논쟁의 시작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을 위해 완전하고도 충분한가?’라는 질문입니다.(여러분도 한번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십자가 사건이 충분하고 완전하다면 이미 우리의 죄는 해결되었고 더 이상 마지막 심판 때에 심판 받을 죄 몫이 남아 있지 않다고 여기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삐뚤어진 해석을 구원파들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이 특히 한국에서 폭 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예정론과 연결되어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완전하고 충분한 것으로 여긴다 하여도 우리가 볼 때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을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이미 정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만을 위해 완전하고 충분하게 이루어 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를 위해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정된 모두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완전한 죄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문제는 설명해 줄 수 있을지 모르나 성경 전체를 흐르는 하나님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서 수없이 강조하고 있는 마지막 심판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심판을 강조하고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심판 받는다고 말하면 우리의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완전한 것도 충분한 것도 되지 못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 문제를 지적하며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참된 구원의 길일까요? 이 두 가지 해석이 서로 충돌하는 것이 성경은 논리적이지 못하고 모호한 것이기 때문일까요? 이미 구원받았기에 아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요? 구원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여기서 다 다룰 수는 없지만 수많은 논쟁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은 무엇일까요? 논쟁이 벌어지는 것처럼 논리도 없고, 모순되고, 완전하지 못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앞서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을 무지와 욕망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한정하는 것은 스스로 구원 받을 만 하다는 자만에 비롯합니다. 행위를 통해 구원 받는 다는 생각 역시 스스로를 높이려는 욕망에서 비롯합니다. 질문이 전혀 잘못 되었습니다. 구원에 관한 모든 질문의 출발점은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라는 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에 관해 논쟁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논쟁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섰다는 마음으로 구원에 대해(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생각을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완전하고 충분한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합당하게 최선을 다해 살라고 합니다. 이 둘이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십자가를 통해 구원 받은 것이라면 그에 합당하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 행위를 통해 구원을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이지 행위가 있다고 모두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선한 행위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선한 행위, 즉 순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구원에 대한 논쟁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십자가의 가치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가치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모두를 향하며 그 안에 내가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예수님, 나를 구원하는 십자가의 가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유한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향해 논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의 사건이 나의 체험이 될 때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큰 아들이 아버지의 태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합니다. 왜 그럽니까? 자신의 은혜가 아니라 타인의 은혜로 보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보면 먼저 온 일꾼들이 나중 온 일꾼들로 인해 포도원 주인에게 불만을 제기합니다. 왜 그럽니까? 자신의 은혜가 아니라 타인의 은혜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나의 은혜로 보지 못하고 타인의 은혜로 보는 것은 자신의 욕망 때문입니다. 내 이익을 우선하는 이기적 욕망, 인간의 근본적인 죄악 된 속성 때문입니다. 큰 아들로 아버지 곁에서 함께하며 살았다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 은혜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일이 없던 중에 아침부터 일을 하였으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 은혜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도 이야기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1) 나의 눈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나 선명하게, 분명하게 밝히 보입니다. 더이상 무엇을 이야기 하겠습니까! 왜 다른 것을 이야기하려고 합니까? 온전히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으로(행하시는 이의 일) 주어지는 구원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5)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본문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11)고 강조합니다. 나의 죄를 속량하시는(13)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의 은혜로 경험하여 온전히 십자가의 가치를 고백하는 모두이시기를 기도합니다.

Posted by usemegod

댓글을 달아 주세요